[중국역사]주원장(3) : '가진 자'에겐 폭군, '없는 자'에겐 성군

전날 주원장이 콤플렉스의 발로로 '문자의 옥'을 일으켜 수많은 인물들을 도륙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도륙사에서 '문자의 옥'은 최초도 최고의 사건도 아니었으니, 아무래도 최초의 도륙기는 명나라 창건의 공신들에 대한 학살일 것이다. 서달 호유용 등의 공신들을 '호유용의 안'과 '남옥의 안'을 연속으로 일으켜 창건공신들을 도륙한 데에 이어 그의 도륙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인 '공인의 안'을 일으키게 된다.

'공인의 안'이란 당시 관리들끼리 관인을 찍지 않은 상태로 세금관련 문서를 처리하는 일이 암묵적인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태였는데(현재의 예로 들자면 결재받지 않은 서류를 결재받은 것처럼 처리하는 일과 비슷하겠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이 이를 발견한 것이다. 주원장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이와 관계된 모든 관리와 그 식솔들을 주살했으니 이 한번의 사건으로만 20여만명을 처형하게 된다.(전번의 글에서 주원장이 수십만명의 '가진 자 혹은 배운 자'를 도륙했다는 말에 당시에 관리가 그렇게 많았나 하는 의문을 품은 사람이 없을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연좌제가 보편화되어 있는 사회였기에 한명이 잘못하면 3족을 멸하는 것은 기본이였으며, 반란의 경우는 9족을 멸하였기에 그만한 규모가 가능하게 된다.)

 
주원장은 공인의 안에서 보듯이 편법적인 행위를 극도로 싫어했는데, 특히 관리들의 부정부패 뿐만 아니라 사치스러운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했다. 뇌물에 대한 주원장의 방침은 이렇다.
'1전이라도 뇌물을 받으면 3족을 멸한다.' 그는 뇌물을 포함한 모든 부패에 대해 최고의 강력한 수단을 사용했으며, 부정을 저지른 자들은 몇 억명이라도 죽여주겠다는 자세를 견지하여 계속해서 죽여갔다. 하지만 아무리 죽여도 관리들의 부정행위가 그치지 않자 주원장은 '어제 죽이고 오늘 아침에 또 죽였는데 또다시 뇌물을 받는구나'라고 탄식하며 또 죽였다.

부정부패가 근절되지 않자, 주원장은 부정을 저지른 관리를 처형한 후 그 인피를 벗기고 안에 집을 채운 인간박제를 만들어 처형된 관리의 후임자가 업무를 볼 때, 옆에 세워두고 부정행위를 할 경우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로 삼게 하기에 이르렀으나, 옆에 인간박제를 세워두고도 부정을 저지르는 관리가 나타나니 주원장은 또 다시 도륙할 뿐이었다.

부정부패 뿐만 아니라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해서도 주원장은 강력한 혐오를 보이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했는데, 만약 조정의 관리가 집에서 화려한 연회를 벌였다면 다음날 주원장은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어떤 음식이 맛있어 보이더라는 둥의 말을 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해 책망의 눈치를 보낸다. (이 쯤에서 말해 두어야 할 것은 관리들의 부패와 반란의 조짐 그리고 민간의 여론 및 생활을 엳보기 위해 주원장은 엄청난 확제직속의 정보조직을 운영했다고 한다.) 그러면 황제의 정보조직이 알아서 움직여 그 관리가 어떻게 돈이 많게 된것인지 탈탈 조사하고, 털면 먼지나지 않는 옷이 어디있겠는가? 주원장의 데스노트에 한명의 이름이 추가될 따름이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주원장은 관리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데 왜 그럴까?

난 그의 어린시절을 상상해본다.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인 주원장의 아버지, 하루도 쉬지 않고 죽어라 땅을 파고 열심히 농사지어도 수확기가 되면 땅주인에게 빼앗기고 관리들한테 빼앗기고 몽골군에게 빼앗기고 나면 남는 건 거의 없다. 너무도 열심히 일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주원장의 아버지, 그 무력함과 처절함을 보면서 어린 주원장은 생각했을 것이다. '두고보자 이놈들 나중에 내가 힘이 생기면 횡포한 무리들을 다 죽여주마, 내 아버지같이 억울한 농민은 없게 하겠다'

대부분의 범인들은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못하고 황제정도의 위치가 되어 몸이 편해지면 마음도 너그러워지고는 한다. (말년병장의 여유?와 비슷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으니 어린시절을... 관리들의 착취를... 하층민의 고난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 

실제로 주원장은 황제가 되어서도 결코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않았으며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지 않았다. 철저하게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며 이를 관리들에게 강요했고, 이를 지키지 못하는 관리들은 결국 그의 데스노트에 기록되었다.

그 많은 관리들을 도륙하고 그 재산(당시의 재산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땅)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의 사회는 '가진 자'만이 '배울 수'있는 사회구조였기에 관리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일정규모 이상의 재산을 가졌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은 모든 압수한 토지(사실상 명나라 전체 토지의 경작가능한 대부분의 토지를 압수했다고 보면 된다.)를 국가에 귀속시켰으며, 이를 기존의 소작농들에게 경작하고 세금을 내게 했으니, 비록 땅의 소유는 국가였으나 농민의 입장에서는 옛날처럼 여기저기서 빼앗기는 돈이 없어져 생활이 안정되니 농민들에게 '못 가진자' 에게는 주원장이야 말로 다시 없을 성군이었으리라.

글을 삼부작으로 나누어 나름 논리적으로 써보려했지만 쓰고보니 두서없는 글이 되어버려 부끄럽기 그지없다. ㅜ.ㅜ

다음에는 고돌피블로그 주원장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 주원장: 에피소드 편이 게재됩니다. 많은 성원바랍니다. 구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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