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야기 : 머리형인간 '이순신'

한 때 내가 다녔던 회사에서 '회사에서 통하는 독심술' 이란 책의 머리형/가슴형/장형의 인간구분이 화재가 되었었다. 이들의 특성을 대강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소프트 웨어            머리형                   가슴형                      장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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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치관)         아는게 힘, 지식, 정보            사람이 재산, 인맥            현찰, 몸이 재산,

                        사실과 진실, 효율적              이미지 관리 중요             힘. 현장. 영역.

                        공사구분, 감정절제               분위기, 느낌                   확! 죽여버릴래! 18!

                        되도록 눈에 안 띄게              눈에 띄어야 해                   

 

사는법              어떻게 하면 힘안들까             혼자 있는게 싫어                한번 가보자

                             (힘들잖아!)                       (외롭잖아!)                    (제대로해!)

 

의사결정           왜죠??                               나랑 친하냐?                   이런~ 싸가지

                       객관적, 합리적,                     마음, 인간성                    예절, 기본, 체험, 경험

                       논리적. 근거, 숫자             인맥, 지연, 학연, 혈연                 일단 해봐

                           (이성파)                            (감성파)                            (행동파)

 

일 순서            되면 한다                            그때그때 달라                       하면 된다                 

                     60% 생각하고 행동                 맘에 들면 해           일단은 가보고, 가보니 아니네?  

                     감정 기복 없음                     감정 기복 심함                  화를 내고 안내고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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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순수한 머리형/가슴형/장형은 없고 나름의 비율로 성격이 혼합되어 있다고하지만, 사람마다 주된 성질은 있다. 나같은 경우는 머리형에 가까웠고, 장형인간들과 충돌이 좀 있었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머리형인간들은 '되는 일을 한다' 이에 대해 장형인간들은 '패기가 없다.' 혹은 '약아빠졌다' 라고 하지만, 뭐.. 내가 머리형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비난은 '되면'의 의미를 잘못파악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된다. 안된다'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시뮬레이션이 바탕에 깔리기 때문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주어진 안건에 대해 머리속으로 시뮬레이션해봤을때, 답이 없어보이는 도전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머리형인간들은 일을 하기 전에 시뮬레이션이 필수이다. 마치 이순신과 같이.

이순신은 16전 16승의 전승신화로 유명하다. 혹자는 그가 전승했던 비결에 대해 다양한 이유를 붙이지만, 적과 아군의 힘을 분석하고 아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병법의 기본을 지킨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당시 조선수군의 주력은 판옥선. 그리고 일부 거북선. 일본 수군의 주력은 누각선과 안택선이었는데, 이를 대강 비교해보면 일본배의 경우 기동력이 좋지만 배가 약한 편이고 조선배의 경우 기동력은 다소 부족하지만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대포의 적재이다. 판옥선이든 거북선이든 튼튼하게 만들어져 대포를 적재하고 쏠 수 있지만, 일본배의 경우 대포를 적재하고 쏠경우 갑판이 부서질 정도로 약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일본의 수군전술은 대포를 사용하지 않고 빠른 누각선을 타고 돌진해서 서로 갈고리 걸고 백병전을 벌이는 뭐.. 그런 식이었다.

정유재란 때는 누각선등에 대포를 달고 나와 같이 쏘기도 햇지만, 일본의 대포운용능력은 형편없었고 갑판에 대포를 놓고 쏘는 것이 불가능하다보니  아래그림처럼 엽기적으로 천장에 매달아 놓고 쏴야했다. 당연히 조준은 불가능했다. 그냥 가까이 가서 정해진 방향으로 쏠뿐.


이순신의 방법은 간단했다. 돌격해오는 적을 향해 일열로 배를 늘어놓고 대포를 마구쏜다. 누각선같은 허술한 배는 대포 한발이 명중한다면 그냥 침몰이었다. 적이 많아 살아남은 적선이 가까이온다면? 천천히 뒤로 후퇴하면서 계속 대포를 쏘니 마치 스타크래프트에서 마린이 질럿을 잡는 형국이다.

공격시에는 주로 어린진을 이용했다. 이는 초승달모양으로 적을 반포위하는 진형으로 대포의 사거리를 일정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적들의 수가 줄면서 자연스럽게 완전히 포위하게 된다. 혹자는 적들은 총을 안쏘냐고 묻겠지만, 조총은 현대의 총에 비해 질적으로 차이가 심하다. 최대사거리는 200m, 유효사거리는 100m정도라고 하지만 이십보밖에서는 조준사가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이는 활의 사거리보다도 못하고 대포의 사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거리다.

이순신의 필승비법은 정유재란이전에는 대략 위와 같이 아군과 적들을 비교분석하고 아군의 피해가 최소화되는 방법을 시뮬레이션하여 그대로 실행하는 머리형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모두들 아는 바와같이 정유년 2월 이순신은 투옥된다. 혹자는 간신배의 모함을 받아서, 뇌물을 주지 않아서 등으로 미화하지만, 사실 이순신이 대역죄를 저지른 건사실이다. (당시의 관점에서) 이기는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을 경우 무조건 전투를 피하는 머리형인간답게. 조정의 명령일지라도 당시 조선왕인 선조의 명령일지라도 질것이 뻔한 전투는 모두 거부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부산진공작전' 이순신의 연이은 승전보에 고무된 선조와 조정의 중신들은 그에게 전 수군을 이끌고 부산진으로 진공하여 수복할 것을 명한다. 무리한 요구였다. 이순신은 불가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적어 장개를 올렸으나, 선조는 그의 항명에 대해서만 화낼 뿐이다. 머리형 인간을 괴롭히는 뇌없는 인간은 어느시대에나 있다.

또하나의 사건은 '가등청정체포사건'이라고 불리는 미확인사건.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세 선봉장 중,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은 서로 공을 다투며 유독 사이가 안좋았다고 한다. 소서행장이 가등청정을 제거하기 위해서 가등청정의 비밀행보를 조선에 비밀리에 알렸고, 이를 입수한 조정은 이순신에게 가등청정을 체포하기 위해 출정할 것을 명한다. 이순신의 대답은... NO. 확실하지 않은 정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성공한다면 적의 사기를 크게 꺽고 가등청정 직속부대의 발을 묶어 (당시 일본은 봉건제이기에 가등청정이 없으면 그의 영지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다.) 적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겠지만, 거짓정보라면 이순신이 오히려 당할 수 있는 상황. 후에 이에대해 이순신이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학자들과 가등청정의 행보에 대한 정보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일본측 계략이라는 주장이 맞서기도 했다.

아무튼 진상이 어떻든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거부한 것은 여러번이었고, 그에게는 항명죄와 대역죄가 성립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치명적인 건 선조에게 크게 밉보인 것이라라. 가뜩이나 의심많고 밴댕이 소갈딱지인 선조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한 장군을 살려둘리 없다.

이순신이 옥에 갖힌 몇개월 후,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어떻게 싸웠을까? 그는 임진애란이 일어나기 얼마전까지만해도 함길도에서 야인들을 무찌른 나름 명장이었으니 그의 방식은 이렇다. '전군 돌진! 그리고 원균은 그 선봉에 서서 적들을 마구 죽인다. 그의 무위에 적들의 사기는 꺽기고 아군의 사기는 고취되어 승리하는.. ' 뭐 그런 방식이다. 그는... 울트라리스크였다. 문제는 그가 수군에 와서도 동일한 방법을 사용했다는거다. 백병전에 능한 일본군과 그들의 병기 조총을 무시하고 그저 돌격할 뿐. 그에게 이순신의 어린학익진은. 대포사격은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오랫동안의 내전으로 백병전에 단련된 일본군의 무위를 농민출신의 조선수군이 따라잡기는 힘들었을 거다. 당연히 장렬히 산화해 주신다. 혹자는 그가 도망갔다고 하지만,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그렇게 비겁한 인간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뇌가 없을뿐.

원균을 대신해 이순신은 급히 파견된다. 그에게 남은 건 열두척의 배. 적들은 수백척. 이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기는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비장의 카드 올돌목을 꺼내드니 (아마도 이 일이 있기 훨씬 전에 물색해둔 곳이 아닐까?) 강한 올돌목 물살앞에 허술한 누각선과 안택선들은 심하게 흔들리며 난파되기 일수였고 이보다는 튼튼하고 큰 판옥선은 비교적 멀쩡하게 해협을 통과한다. 그리고 살아나은 적들에게는 이순신표 대표세례까 기다렸으리라. 이른바 명령해전 12대 333의 전투를 승리하게 한 것은 그의 심모원려와 천운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으리라.

명량해전 후 전열을 정비한 이순신은 또 다시 승리방정식을 계속 써갔으며 노량해전에서 승리와 함께 명장은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그곳에서 이순신이 죽은 것은 운명이었으리라. 비록 전쟁에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을 선조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조정중신들 또한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이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할까봐 그를 견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전사를 자살로 추측하고, 심지어 조선군 중의 암살자에게 살해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비운의 천재 이순신. 차라리 내가 읽은 어떤 황당한 무협지에서처럼, 죽음을 가장하고 중국으로 넘어가 무림맹주가 되었다면 오히려 좋겠다.

[한국역사인물] 퇴계이황 : 내가 가장 존경하는 위인.

그냥 블로그를 살펴보다가. 명색이 한 때 역사학도였다고 만들어놓은 '역사잡설' 카테고리에 주원장 이야기만 조금 있고 너무 썰렁한게 맘에 걸린다. 잠깐 생각하니 그냥 퇴계 이황이 떠오른다.

<답사때 방문했던 도산서원>


고등학교 때부터 왜 그리 인적조사를 많이하는지, 그 때마다 각가지 호구조사와 설문조사들에 간혹 존경하는 인물이 누군지 적으라는 난이 있곤 했더랬다. 고등학교 때는 그냥 아무나 적고는 했었는데.. 강감찬, 이순신 등 장군들을 많이 적었던 것 같다. 대학교 들어가서 영남에 답사하러 갔다가 우연히 참석한 세미나에서 퇴계이황선생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이후의 모든 설문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란에는 '이황'이 기록되게 되었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28831

이황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하고. 그의 생애나 업적이 궁금하다면, 그냥 위의 링크를 보면 될 것이다. 내가 인상깊었던 점은. 기대승과의 논쟁이었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안나지만 16세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황이 50대말로 성균관 대사성이었고 기대승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후였다. 성균관 대사성은 오늘날로 치면 서울대 총장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 어느날 기대승이 이황의 집을 찾아왔고 논쟁은 시작되었다. 논쟁의 핵심은 이황의 '이발기승론', 기대승은 이에 대해 '기발이승론'을 들고나와 이황의 학설을 비판해왔다.
중요한 부분만 설명하면, 이와 기 중 어떤 것이 현상이 일어나는 원동력인가? 라는 문제다. 둘은 논쟁은 한동안 이어졌고, 이황은 기대승의 학설을 받아들여 '이기호발설'로 절충했다. 듣고보니 너의 말도 맞다. 이거였지.

내가 지금 서울대총장(지금 누구더라?) 찾아가서 이야기좀 하자고 하면, 내 이론이 그럴듯하고 말고를 떠나서 일단 만나지도 못하겠지.

원래 쌓아녾은 것이 많을수록 그것에 대한 집착은 커지게 된다. 그것이 재산이든 명예든 학문이든. 그리고 성가하기 전에 깨달았던 자신의 법칙이 절대적으로 맞다고 확신하며, 그것과 다른 주장은 모두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오늘날의 누군가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경우 '좌파'라고 규정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이렇다. 라는 것은 자연현상 밖에 없으며. 어떤 가치나 도덕 또한 심지어 '살인' '간통' '절도' 등 죄라고 칭해지는 것조차 어떤 상황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으니, 세상에 유일하게 변하지 않을 가치는 '다원주의'뿐이리라.(난 그래서 공산당이 싫다)

나는 내가 위대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황처럼 나이가들어도 뭔가 쌓아놓은 것이 생겨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자세와 깨인머리.

뭐 현재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깨인 사람이 되어)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계속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겠지. 그리고 자주 돌아봐야할 부분이다. 쓰다보니 역사이야기가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분류이동해야하나... ;;;

[중국역사]주원장(4) : episode 명태조 주원장 vs 조선 정도전

주원장에 대한 3편의 허접한 글에 이어 정도전과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제목을 보고 사람들은 주원장과 정도전이 무슨관계지? 하겠지만. 우선 각각인물의
프로필을 살펴보자.

주원장 [, 1328.10.21~1398.6.24]
중국 명()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1368∼1398). 홍건적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각지 군웅들을 굴복시키고 명나라를 세웠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 한족()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별칭 묘호 태조
국적 중국 명
활동분야 정치
통도사 불이문 현판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경남유형문화재 제252호. 현판은 명 태조 주원장의 친필로 '원종제일대가람'이라 쓰여 있다.
정도전 [, 1342~1398]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문신 겸 학자.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역활을 했다. 하지만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저서에《삼봉집》,《경제육전》, 《경제문감》등이 있다.
본관 봉화
삼봉
별칭 자 종지
활동분야 정치·문학
주요저서 《삼봉집》 《경제육전》
진신도팔경시 / 삼봉 정도전이 새로 세워진 수도 서울의 아름다움과 위용을 그린 시조이다.

같은 시대를 살다가 같은 해에 죽은 두 인물은 실제로 만난적이 있으니, 정도전이 조선건국 후 중국을 방문하여 여행 중에 명황제인 주원장을 배알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후 두사람의 인연은 끊어지는 듯 했으나, 후에 조선건국에 대한 표전(by 정도전)에 則, 光 과 같은 주원장 금칙문자들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빌미로 주원장이 조선에 정도전을 보낼 것을 요구함으로서 다시 이어지게 된다.

전번의 글에서 주원장의 광기가 어떠했는지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 광기가 국경을 넘어서 조선에 까지 미쳤다고 생각하면 매우 편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으니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주원장과 정도전은 서로 대면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용이 용을 알아보듯 호랑이가 사자를 알아보듯 전기가 통한 그들! 주원장이 어디 적이 될만한 소지를 남겨둘 인물이던가!! 정도전에게 대강 죄를 씌어 죽이려고 햇던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 역시 보통인물은 아니고 또한 정도전은 그의 최고 심복이기에 다른 인물들을 대신 보내서 주원장에게 약을 올릴 뿐이었다. 사실 주원장으로서는 군대를 보내고 싶었겠지만, 원나라를 몰아내고 얼마 안된 상황이라 아직 원의 잔존세력(북원)이 건재한 상황에서의 조선원정은 주원장으로서는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원장은 왜 정도전을 죽이려했을까? 그냥 표전의 금칙문자 때문이라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는 한 두개가 아니고 그 문서에는 주원장의 금칙문자가 모두 들어있었다. 하지만 주원장은 오직 정도전만을 시비걸고 넘어졌으니 이는 정도전에 대한 타게팅된 위협이라고 할 수 있다.
(주원장은 싸이코지만 사리분별은 명확한 싸이코였다.)

아마도 주원장은 정도전에 후에 명나라에 위협이 될 존재로 파악을 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는 어떠할까?

실제로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계획하며 진법훈련등을 실시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했는데, 대부분의 한국사 학자들은 정도전의 요동정벌은 이방원을 견제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다라고 폄하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도전은 주원장을 만나고 돌아오다가 우연히 주체(후의 영략제)를 만나게 되는데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이런말은 한다. "주체를 만나보니 왕자로 인상을 마감할 사람은 아니다. 반드시 후계자 전쟁을 일으킬 사람이구나. 명나라에서 내분이 일어난다면 조선이 중원을 차지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느냐?"(어떤 사료에 남아있고, 정확히 뭐라고 햇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대략 이런 의미였음 ㅡ.ㅡ;;)

어쩌면 이 말을 주원장이 전해듣고(그의 정보력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이야기 했었다.) 정도전을 제거하려고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연 후의 주체의 반란 때, 조선이 군대를 일으켜 북원과 동맹하고 명을 공격했다면 어떻게 됬을까? 역전의 용사 이성계가 이끄는 조선군과 아직도 강력한 북원!!

이방원은 정도전을 기습공격으로 제거한 후,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마련하기 위해 정도전이 계획했던 요동정벌 등을 모두 백지화한다. 그리고 몇년 후의 명의 내란 때도 강건너 불구경했으니, 정말 병신이로다. 나는 사대주의자 이방원이 싫다. 용의눈물은 무신;;;
쫌생이 쥐새끼에 불과할 뿐이다.


대마왕 주원장조차 경계한 진정한 조선의 용 정도전이 쥐새끼같은 사대주의자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어쩌면 조선의 역사는 시작부터 꼬여버렸으리라.

<정도전 영정>


주원장에 대한 이야기는 이정도로 끝마칩니다. 그리고 위의 내용이 사실인지 궁금해하시는 분이 있으실 듯한데^^; 모두 사료에서 읽은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니(제가 동양사학과 출신이라.. 근데 뭔지는 오래되서 기억이 가물가물)  사료가 조작되지 않았다면 사실에 가깝겠죠.


암튼 주원장 이야기는 여기서 끝!!
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면 추천좀!!

[중국역사]주원장(3) : '가진 자'에겐 폭군, '없는 자'에겐 성군

전날 주원장이 콤플렉스의 발로로 '문자의 옥'을 일으켜 수많은 인물들을 도륙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도륙사에서 '문자의 옥'은 최초도 최고의 사건도 아니었으니, 아무래도 최초의 도륙기는 명나라 창건의 공신들에 대한 학살일 것이다. 서달 호유용 등의 공신들을 '호유용의 안'과 '남옥의 안'을 연속으로 일으켜 창건공신들을 도륙한 데에 이어 그의 도륙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인 '공인의 안'을 일으키게 된다.

'공인의 안'이란 당시 관리들끼리 관인을 찍지 않은 상태로 세금관련 문서를 처리하는 일이 암묵적인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태였는데(현재의 예로 들자면 결재받지 않은 서류를 결재받은 것처럼 처리하는 일과 비슷하겠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이 이를 발견한 것이다. 주원장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이와 관계된 모든 관리와 그 식솔들을 주살했으니 이 한번의 사건으로만 20여만명을 처형하게 된다.(전번의 글에서 주원장이 수십만명의 '가진 자 혹은 배운 자'를 도륙했다는 말에 당시에 관리가 그렇게 많았나 하는 의문을 품은 사람이 없을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연좌제가 보편화되어 있는 사회였기에 한명이 잘못하면 3족을 멸하는 것은 기본이였으며, 반란의 경우는 9족을 멸하였기에 그만한 규모가 가능하게 된다.)

 
주원장은 공인의 안에서 보듯이 편법적인 행위를 극도로 싫어했는데, 특히 관리들의 부정부패 뿐만 아니라 사치스러운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했다. 뇌물에 대한 주원장의 방침은 이렇다.
'1전이라도 뇌물을 받으면 3족을 멸한다.' 그는 뇌물을 포함한 모든 부패에 대해 최고의 강력한 수단을 사용했으며, 부정을 저지른 자들은 몇 억명이라도 죽여주겠다는 자세를 견지하여 계속해서 죽여갔다. 하지만 아무리 죽여도 관리들의 부정행위가 그치지 않자 주원장은 '어제 죽이고 오늘 아침에 또 죽였는데 또다시 뇌물을 받는구나'라고 탄식하며 또 죽였다.

부정부패가 근절되지 않자, 주원장은 부정을 저지른 관리를 처형한 후 그 인피를 벗기고 안에 집을 채운 인간박제를 만들어 처형된 관리의 후임자가 업무를 볼 때, 옆에 세워두고 부정행위를 할 경우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로 삼게 하기에 이르렀으나, 옆에 인간박제를 세워두고도 부정을 저지르는 관리가 나타나니 주원장은 또 다시 도륙할 뿐이었다.

부정부패 뿐만 아니라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해서도 주원장은 강력한 혐오를 보이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했는데, 만약 조정의 관리가 집에서 화려한 연회를 벌였다면 다음날 주원장은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어떤 음식이 맛있어 보이더라는 둥의 말을 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해 책망의 눈치를 보낸다. (이 쯤에서 말해 두어야 할 것은 관리들의 부패와 반란의 조짐 그리고 민간의 여론 및 생활을 엳보기 위해 주원장은 엄청난 확제직속의 정보조직을 운영했다고 한다.) 그러면 황제의 정보조직이 알아서 움직여 그 관리가 어떻게 돈이 많게 된것인지 탈탈 조사하고, 털면 먼지나지 않는 옷이 어디있겠는가? 주원장의 데스노트에 한명의 이름이 추가될 따름이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주원장은 관리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데 왜 그럴까?

난 그의 어린시절을 상상해본다.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인 주원장의 아버지, 하루도 쉬지 않고 죽어라 땅을 파고 열심히 농사지어도 수확기가 되면 땅주인에게 빼앗기고 관리들한테 빼앗기고 몽골군에게 빼앗기고 나면 남는 건 거의 없다. 너무도 열심히 일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주원장의 아버지, 그 무력함과 처절함을 보면서 어린 주원장은 생각했을 것이다. '두고보자 이놈들 나중에 내가 힘이 생기면 횡포한 무리들을 다 죽여주마, 내 아버지같이 억울한 농민은 없게 하겠다'

대부분의 범인들은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못하고 황제정도의 위치가 되어 몸이 편해지면 마음도 너그러워지고는 한다. (말년병장의 여유?와 비슷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으니 어린시절을... 관리들의 착취를... 하층민의 고난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 

실제로 주원장은 황제가 되어서도 결코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않았으며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지 않았다. 철저하게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며 이를 관리들에게 강요했고, 이를 지키지 못하는 관리들은 결국 그의 데스노트에 기록되었다.

그 많은 관리들을 도륙하고 그 재산(당시의 재산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땅)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의 사회는 '가진 자'만이 '배울 수'있는 사회구조였기에 관리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일정규모 이상의 재산을 가졌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은 모든 압수한 토지(사실상 명나라 전체 토지의 경작가능한 대부분의 토지를 압수했다고 보면 된다.)를 국가에 귀속시켰으며, 이를 기존의 소작농들에게 경작하고 세금을 내게 했으니, 비록 땅의 소유는 국가였으나 농민의 입장에서는 옛날처럼 여기저기서 빼앗기는 돈이 없어져 생활이 안정되니 농민들에게 '못 가진자' 에게는 주원장이야 말로 다시 없을 성군이었으리라.

글을 삼부작으로 나누어 나름 논리적으로 써보려했지만 쓰고보니 두서없는 글이 되어버려 부끄럽기 그지없다. ㅜ.ㅜ

다음에는 고돌피블로그 주원장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 주원장: 에피소드 편이 게재됩니다. 많은 성원바랍니다. 구벅

[중국역사]주원장 : 컴플렉스의 화신

전 번 글에서 주원장이 '가진 자와 배운 자'를 믿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바로 장사성의 개명에 대한 사건이다. 원나라가 망해가는 무렵 중국 각지에서는 다양한 반란들이 일어났는데, 특히 원나라의 세력이 약했던 강남에서는 특히 강력한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바로 주원장, 진우량, 장사성의 무리이다.

그 중 장사성은 소금장수 출신으로 염전의 경제력과 소주/항주의 부유함을 등에 업고 원말 군웅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는 비록 배우지 못한 이였지만 문인과 선비 등 '배운 자'들을 매우 후하게 대접하며 중용하고는 하였는데, 그가 세력을 쌓은 후 주변 문인들의 추천을 받아 '장사성'이라고 개명하게 된 것이다.(원래 이름은 기억이 잘 ㅡ.ㅜ)

장사성이라고 개명했다는 말을 듣고는 주원장은(주원장 또한 원래이름은 아니다. 원래는 매우 촌스러운 이름이었는데, 결혼 후 개명했다.) 참으로 좋은 이름이라고 말하자 주원장의 장자방이라고 할 수 있는 유기는 이에 대해 주변의 문인들이 무례하고 사악하기 그지없다고 말하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유기는 맹자 중의 '士誠小人也'라는 구절을 들려주었다.

'士誠小人也'는 직역하지만 '선비는 진실로 소인이다.' 의역하자면 '선비란 것들은 (잘난척하지만) 사실은 모두 소인배들이다.' 정도로 해석된다. 誠이 부사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하지만 띄어읽기를 잘못하면 '士誠은 소인이다.'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바, 장사성의 신하들은 그의 무식함을 비웃어 '士誠' 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이를 들은 주원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본인의 무식함을 걱정하지 않았을까? 본인의 무식함을 누군가 비웃을까봐 걱정하고, 과거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 절에서 중생활을 했음을 비웃을까봐 걱정하고 한 때, 도적의 무리에 속해있었던 것을 비웃을 까봐 걱정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는 가공할 만한 문자의 옥을 일으켰으며, 자신에게 올라오는 문서에 僧(자신이 중이었음을 비웃을까봐), 光(중의 머리가 빛이나므로..), 敵(자신이 도적의 무리였음을 비웃을까봐), 則 (도적 적자와 당시의 중국어로 음이 같아서 돌려서 자신을 비웃을 까봐) 등의 문자를 사용한 관리들을 단체로 도륙했으며, 급기야 그러한 문자에 대한 금지령까지 내리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문자의 옥만으로 수십만을 죽인 것은 아니니... 사람들을 도륙한 또 다른 이유 또한 존재한다.

(다음 편에...)

[중국역사]주원장 : 중국 역사상 최고의 폭군?

흔히 중국역사상 최고의 폭군이라고 하면 누구를 떠올릴까? 

1순위로는 '진시황'을 떠올릴듯하며,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하왕조의 걸왕이나 은나라의 주왕을,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오나라의 손호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폭군이라는 단어에 대한 연관검색어 1순위로 주원장(명태조 홍무제)만큼 잘 어울리는 인물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가 더 폭군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우선 폭군의 정의부터 내리고 넘어가야 할텐데..

폭군 [暴君]
[명사]
1 사납고 악한 임금.
2 다른 사람을 힘이나 권력으로 억누르며 사납고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전에는 위와같이 나와있지만.. 너무 추상적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처형했는가를 폭군의 최고 덕목?으로 보았으며, 그 누가 감히 수십만명을 처형한 주원장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주원장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
그가 한두명을 죽인것은 아니기에 꼭 같은 이유가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주원장이 처형한 인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가진 자 혹은 배운 자' 였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황제에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로서 어려서부터 '가진 자'들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복수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못하기에 황제가 되면 가난했던 시절을 기억 못하고 원래 부자인양 원래 황제인냥 방탕한 생활을 할 법도 한데...

황제가 된 후에도 '가진 자들과 배운 자'들을 그렇게 미워한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것은 컴플렉스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주원장이 '가진자'들에게 컴플렉스를 가질 만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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